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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거


군사-전쟁 이론 패러다임에 대한 고찰

국방과기술 국방과기술 2010년 12월호
[ 군사-전쟁 이론 패러다임에 대한 고찰 (1) - 남보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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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 Tom Holland


   톰 홀랜드는 잘 팔리는 작가다. 그의 글은 재기발랄하면서도 삶에 대한 통찰을 던진다. 이러한 장점 중 그의 가장 큰 강점은 역사를 재구성하는 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역사를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거대하고 극적인 한 편의 비극이자 희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를 간파하여 역사를 한 편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서 즐기기란 쉽지 않은 것이, 역사는 현실의 일이다 보니 세상의 그 많은 등장인물들과 그 많은 사건들을 일일이 조합하고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E. H. Carr가 말했듯이, 중요한 사건과 중요치 않은 사건을 구분하는 일이야 말로 역사 기술의 첫 걸음이다. 하지만 인물은 어찌할 텐가? 당연한 말이겠지만, 역사는 세상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이며 누구 하나 역사의 주체로서 소홀히 대할 수 없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삶의 주인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처한 시대를 고민하고 느꼈으며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여 살고 죽어갔다. 설사 역사가 그들을 패배자로 치부한다고 해도 이들을 놓쳐서야 어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하물며 이야기란 자고로 적이 보다 강대할수록, 보다 지혜로울수록 흥미진진한 법이다. 톰 홀랜드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를 잘 알고 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의 발흥지로서 그러하고, 서양 문명의 기원으로서도 그러하다. 그리스 신화와 미술, 철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로지 고대 그리스를 침략한 적이자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해 사라진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거대한 제국을 이뤘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압제자들에 의한 악의 제국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선악의 이분법적 논의는 정당한가? 말할 것도 없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




 톰 홀랜드는 아테네 민주정의 성립을 이렇게 요약한다. 소수 귀족가문의 권력 쟁탈전 도중 등장한 최후의 무기. 그렇다. 아테네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겠으나, 그 시작은 분명 그러했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기 직전, 지금껏 가장 사악하고 오만했던 한 가문이 놀랄만한 제안을 들고 나왔다. 바로 권력을 대중에게 넘겨주자는 것. 당연히 이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폭발적이었고, 가장 사악했던 가문은 삽시간에 가장 위대한 가문으로 변화하여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는 어찌 보면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허나 더 중요한 것은 비록 민주정의 시작은 이러했으나 이를 지킨 것은 힘없고 평범한 시민들의 열망이었다는 것이다. 자유를 원하는 그들의 바람이 살라미스의 승리를 이룩했다.




 한편 페르시아는 어떤가? 놀랍게도 페르시아는 정의의 제국이다. 페르시아는 빛과 광명의 신이자 정의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대변자다.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성전을 행하고 해가 뜨는 동쪽에서 해가 지는 서쪽까지 빛이 미치는 세상의 모든 곳에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이로서 페르시아는 문명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 이 평화는 인류가 최초의 정착 생활을 시작한지 무려 11,500년, 메소포타미아의 땅에 수메르가 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지 어언 4,5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1만 년간의 분쟁을 잠시나마 종식시킨 그들의 정의는 물론 그들 자신이고, 악은 그들의 적이었다. 찬양해 마땅할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일이란 것이 어찌 그렇게 단순하기만 하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자유를 대가로 했다.


 톰 홀랜드는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9월 11일의 사건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여기서 그는 일견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추켜세우며 급진 무슬림의 광신성을 깎아내리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는 어쨌든 잘 팔리는 작가이고 독자가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인간의 역사는 수없이 많은 차원의 복합적인 선율을 만들어내고 남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는 독자가 읽고 싶은 대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지금 세계의 패권을 쥐고있는 미국과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를 찬양해 마지않는 자들은 이 책을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과 그가 내세우는 정의세계의 구현에 염증이 난 이들은 자유에의 갈망이 거대 제국을 상대로 거두는 놀라운 승리로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양자의 묘한 엇갈림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가 묘하게 맞물려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듯, 세상은 광기어린 소용돌이니까.


決死 - 해이수의 단편 『絶頂』을 읽다 문학

決死  - 해이수의 단편 『絶頂』을 읽다

나는 오랫동안 소위 동양의 고전이라는 것들을 탐독했다. 하지만
孟子라든지 荀子라든지 하는 책들이 주장하는 가치들은 현대인의 사고방식, 이른바 합리와 이성이라는 가치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왕이 다스리는 세상, 불평등에 기반한 세상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런 책들에 빠지게 된 시점부터 줄곧 사상적 방황아로 전락해야 했다. 결코 합리적일 수 없는 가치, 현세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에 매료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얼마 전 왕을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 천도의 구현자로서 오래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그에게 바쳐야 할 것은 자명하며, 천명이 그에게 있는 한 충성의 대상은 둘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세상, 이를테면 서기2000년이 될 때 까지도 성리학 국가 朝鮮이 살아남아 있는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개인이 겪을법한 내적 혼란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한 이야기였다. 분명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내가 상정한 주인공의 선택은 주어진 운명에 대한 투쟁이었고, 끝내 비극으로밖에 마무리 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FERE LIBENTER HOMINES ID QUOD VOLUNT CREDUNT’[1]라 했다. 내가 해이수의 단편소설 『絶頂』을 읽은 건 이러한 배경 하에서였다. 그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실패하여 단두대 앞에 선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과 함께 묶인 왕의 모습을 보며 실패를 통감한다. 사형당하기 직전, 왕은 적왕을 상대로 마지막 부탁을 한다. 잘려진 자신의 목을 들고 부하들 앞을 걸어갈 테니, 지나쳐간 부하의 생명은 살려달라는 것. 놀랍게도 왕은 자신의 약속을 이뤄내어 부하들을 구한다.

얼핏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생명이라는 한계가 허락하는 데 까지만 나아갈 수 있다. 죽음은 극복할 수도, 투쟁할 수도 없는 절대적 종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 결코 꿈꿀 수 없는 것을 시도하여 성공했기 때문이며,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바로 투쟁과 왕이다.

絶頂』에서 왕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 최대의 투쟁은 바로 자기와의 대결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투쟁의 열매보다 그 과정에 더 많은 양분이 있으며’, ‘패배를 예감하면서 시작하는 투쟁도 있다. [2] 그들이 반란을 시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이 새로이 만들고자 한 세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패배할 운명과 나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투쟁하리란 사실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은 원장의 배신, 즉 투쟁의 가장 무서운 적인 고독의 엄습 혹은 이미 정해진 운명에 잠시 좌절한 듯 보인다. 하지만 왕은 끝내 죽음, 모두가 생각하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나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3]라던 자기 자신마저 초월함으로써,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이들에게 행한 약속을 지켜낸다. 이로서 왕은 인간이 최후에 도달할 마지막 장벽을 넘어선다. 그의 의지는 왕의 자손들에게 이어짐으로써 시대와 세대마저 초월한다.[4] 그의 승리는 아찔하며, 통쾌하다.

그러나 왕이 행한 초월은 단지 그에게서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왕이란 결코 지배자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왕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직접 닿아 존재하는 분신과 같다. 司馬遼太郞가 말했듯, 충성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운명의 를 지닌다. 반쪽은 자신의 가슴 속에, 다른 반쪽은 왕에게.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설사 모든 일이 어그러져 가슴 속의 부와 함께 자신의 육체도 사라져 버린다고 할지라도 말이다.[5] 하물며 성공이야 달리 말할 필요나 있으랴. 그렇기에 왕의 잘린 목은 마침내 눈을 감을 수 있었다.[6]

돌이켜보면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줄곧 주목해 왔던 가치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고죽의 번뇌와 도전, 그리고 위대한 실패에서 금시조를 보았고, 뼈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겠다고 외치던 맥베스에게서 운명의 질곡을 향한 투쟁과 번뇌에 울었으며, 劉邦大風歌에서 신분, 즉 타고난 운명을 극복한 자의 흥얼거림에 웃었다. 운명, 번뇌, 그리고 투쟁. 카이사르의 저 유명한 말처럼 나는 문학에서 내가 보고 싶던 것을 보았다. 여태껏 문학 속에서 교과서적인 정답만을 추구해왔던 나로서는 극적인 변화라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허나 자칫하면 작가와의 대화를 도외시하고 자기 자신의 굴레에 얽매일지도 모를 이러한 방법을 두고 올바른 읽기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다.



[1]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만을 본다. (GAIUS JULIUS CAESAR. COMMENTARI DE BELLO GALLICO, 3.18.)

[2]해이수 외 9, 현대문학, 2008, 絶頂, peak - 피크』, pp113.

[3]전게서, pp108.

[4]해이수 외 지음, 황소북스, 2010, black coffee day,『수업』, pp224~231에서 저자의 에세이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저자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라는 주제에 강한 애착을 지닌 듯 보인다.

[5]司馬遼太郞, 양억관 옮김, 도서출판 달궁, 2002,『항우와 유방』권3, pp277.

[6] 윤후명 외 지음, 해럴드 경제 편집국 엮음, HERALD MEDIA, 2010, 「희미한 초상」,『나는 가짜다』, p27~31에서 저자는 정신의 창, 영혼의 렌즈로서 눈빛에 깊이 천착하는 버릇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만큼 왕의 잘린 목이 보인 눈빛의 변화는 간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일본의 슬픔 경제


일본 제조업의 기술력은 탁월하다
너무나 탁월한 나머지 일본 내에서만 수많은 기업이 경쟁 중이다
이들이 먼저 신기술을 개발하고 일본 기업끼리 경쟁하다 보면
어느새 기술이 한국과 중국에 유출...
값싼 제품에 밀린 일본 기업은 해당 시장에서 도태된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아마 또 한국 중국에 밀리겠지 ㅠㅜ



출처는
해외경제정보 제2010-36, 2010. 9. 28.
해외조사실 아주경제팀에서 만드신 그래프

The Wheel of Fortune - Macbeth 문학

William Shakespeare. Macbeth. – Wheel of Fortune

나는 예전 119에서 일하며 많은 망자를 보았다. 죽음의 양상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쉽게 죽었고, 표정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의 입매에는 희미한 공허함마저 걸려있었다. 아마도 여기엔 나의 마음이 투영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가리켜 진실한 소리라 말하지 않았는가. Macbeth, 셰익스피어의 저 유명한 작품에 드러난 통찰이 옳다면, 인간이 마지막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란 의례 그런 걸지도 모른다.

Macbeth』는 중세 유럽을 무대로 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다. 전쟁 영웅 맥베스는 자신이 왕이 될 거란 예언을 듣는다. 양심과 야심 사이에 갈등하던 그는 왕위를 찬탈하고, 두려움과 죄책감에 폭군이 된다. 마침내 자신의 부인은 미쳐 죽고, 맥베스는 그간 자신이 살해한 자들의 유족의 군대와 싸우다 살해당한다.


Macbeth!



 

이는 일견 무자비한 야심가의 당연한 최후를 다룬 뻔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단순히 읽히지 않는다는 데서 맥베스의 묘미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서 인간 본성과 운명의 밑바닥을 어루만진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맥베스는 최후의 전투에 임하며 이렇게 외친다. “I’ll fight till from my bones my flesh be hack’d[MAC.5.3.32] 그는 끝없이 싸우고 싸운다. 마침내 최후마저도 싸우다 죽는다. 설사 상대가 자신을 죽이도록 운명 지워진 상대, 망자에게서 태어난 자라도 그러하다. 투쟁하는 자, 셰익스피어가 바라본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통찰한 인간은 다만 투쟁할 뿐인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맥베스는 고뇌하고 번민한다. 그 이유는 우선은 야심이었고, 그 후에는 안전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인간인 이상 이러한 욕망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하지만 그것들이 양심과 충돌하기에 모든 모순이 시작된다. 그의 결심은 통렬하다. “Each corporal agent to this terrible feat. Away, and mock the time with fairest show[MAC.1.7.80]” 고통 받는 양심은 처음에는 망설임과 주저함으로, 뒤에는 용서받지 못 할 폭거로서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맥베스가 광기 어린 집착 끝에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의 모습은 한없는 비감으로 다가온다. 그가 겪은 좌절은 바로 독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인간 본성의 복잡미묘함을 짚어낸다.


운명의 세 마녀



독자들은 이렇게 맥베스에게 빙의하여 함께 변화무쌍한 운명에 휘말린다. 마녀의 제안은 느닷없었고, 맥베스에게 제시 된 건 미래에 대한 헛된 희망과 모호한 전망 뿐 이었다.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돌이킬 수 없는 악을 낳고, 단 한 차례로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든 일들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악의 크기는 죄책감과 더불어 커져갈 뿐이다. “My way of life is fall’n into the sear, the yellow leaf[MAC.5.3.22-23]” 시들어 버린 낙엽처럼 계속된 투쟁, 의심, 죄책감, 반복의 끝에는 패배와 죽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가 인식한 인간의 운명이란 그런 것 인가. 운명에 따른 최후가 명백해 보이는 자는 맥베스와 그의 부인 뿐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운명의 질곡은 단지 맥베스 일가의 사정으로만 한정 지을 수 있을지 않을까.

그러나 희망찬 면책은 쉽지 않을 듯 하다. 맥베스를 살해하고 새로운 왕이 될 맬컴이 맞을 운명 때문에 그러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지닌 모든 부덕과 걸어야 할 길을 알고 있음에도 맥베스가 밟은 과정을 다시 거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결국 Wheel of fortune 아래 인간의 운명은 반복한다. 그것도 부질없이 말이다.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MAC.5.5.26-28]” 인생이란 맥베스의 말처럼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듯, 마치 허공을 가르는 칼처럼.



The Wheel of Fortune




다만 이상의 과정들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순간에 다가온다. 부질없는 투쟁과 번뇌가 인간의 숙명임을 깨달았을 때,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다가온다. 인생은, 운명은 비극이며 너 역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설사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모든 것이 이토록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운명의 질곡을 결코 끊을 수 없는가. 여기에 답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삶은 진정으로 비극이라는 결론으로 귀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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